한의학과 한방의 혼(魂)이 살아 숨쉬는 ‘동의보감촌’

유의태, 초객·초삼 형제 등 시대를 빛낸 명의 배출
역사와 현재 체험거리 조화 전국적 힐링장소로 자리매김 의료관광 도시 건설 총력

  • 입력 2020.02.12 15:00
  • 수정 2020.02.12 15:03
  • 기자명 /노종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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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 동의보감촌 전경.
▲ 산청 동의보감촌 전경.

 지리산의 고장 산청군, 예로부터 예와 충절의 고장으로만 여겨졌던 청정지역 산청이 한의학의 성지(聖地)로 재조명 되고 있다. 지난 2013세계전통의약엑스포의 개최지이자 1000여 종의 약초가 자생하는 민족의 영산 지리산을 끼고 있는 청정골 산청, 그 무엇보다 산청에선 역사적으로 특출한 명의들을 배출한 것이 돋보인다.

 흔히들 산청하면 소설 동의보감에서 등장하는 신의(神醫) 류의태 선생이나 동의보감의 편찬자 명의(名醫) 허준만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산청에는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세출의 다른 명의(名醫)들도 있었다. 역사 기록은 앞선 두 사람을 조선 명종 때에 의술을 펼친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그로부터 100년 뒤 조선 숙종 때 생초면에 유이태(劉以泰)가 살았는데, 신의(神醫)로 정평이나 청나라 조정에까지 가서 의술을 펼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 단성면에 양천 허씨 가문에 초객, 초삼 형제명의가 나서 많은 환자를 치유시켰고, 대를 이어서 초삼의 아들 허제(許濟)가 의술로서 명성을 떨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산청이 이처럼 한의학 성지의 전통을 잇게 된 것은 영봉 지리산 자락의 청정한 자연환경과 1000여 가지 자생약초와 약수 등과 연관성이 있고 산청군에서는 이러한 한의학의 모든 것들을 동의보감촌을 만들어 그 정신들을 계승하고 있다. 

 ◆신연당 유이태

 신연당 유이태(劉以(爾)泰, 1652 ~ 1715)는 조선 숙종 때의 사람으로 산청군에서 민초들을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구해낸 인물이다. 특히 유이태는 소설 동의보감에서 허준의 스승으로 등장한 류의태의 실존 모델일 가능성이 높다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어 더욱 관심을 끄는 과학 선현이다. 

 유이태의 본래 고향은 거창이었으나 10세 전후에 외가인 산청군 생초면 신연마을로 옮겨와 의술을 펼쳤다고 한다. 유이태는 숙종 때 어의(御醫)를 지냈다. 1706년 유이태는 전국에 두진(痘疹:천연두)과 마진(痲疹:홍역)이 퍼져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는 것에 자극받아 천연두와 홍역 예방·치료에 대한 의학전문서인 ‘마진편(痲疹篇)’을 펴냈다. 

 그가 거창에서 생초로 옮긴 까닭은 효능이 뛰어난 약초와 물 때문이었다. 유이태가 남긴 ‘마진편’에는“산청의 어느 절 스님들이 홍역에 걸렸는데 샘물을 반복해 마시게 해 치료했다”는 글이 있다. 물을 통한 치료행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의 의술은 나중에 왕실에까지 알려져 1710년 한양으로 불려간다. 당시 임금인 숙종이 머리에 종기가 나 붓고 열이 가시지 않아 고생하는데도 어의들의 처방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전국의 유명 의사들을 불러 진찰하게 했는데 아산 현감 신우정(愼禹定), 안동의 박태초(朴泰初)와 함께 차출 된 것이다. 이른바 재야 의사들 가운데 전국 3대 명의(名醫)였던 셈이다. 이어서 1713년과 1715년에도 왕실에 불려가 숙종의 병을 치료했다. 1715년 그는 임금을 치료한 공로를 인정받아 말 한 마리를 하사받고 귀향하는데, 그 후 곧바로 사망한다. 또한 유이태는 청나라 고종의 두창을 고치는 등 의술을 중국에까지 떨쳐 중국의 명의 편작에 비유될 정도였다고 한다. 

 부산대 이종봉(사학과) 교수는 “유이태는 산청과 거창, 진주, 합천 등 서부경남지역에서 많은 사람을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낸 인물”이라고 밝혔다.

 특히 그가 저술한 ‘마진편’은 조선후기 홍역과 천연두 치료 의학 발달에 기여한 의서로 정약용의 ‘마과회통’보다 앞서 발간된 것이다. 숙종이 유이태를 안산군수로 명했지만 부임하지 않고 산청 등지로 돌아가 불쌍한 병자를 치료하는 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죽어서는 경호강을 바라보는 생초면 갈전리 명주골에 안장되는데, 그가 생전에 즐겨 처방했던 승마갈근탕과 그가 안장된 지명 갈전(葛田), 즉 칡뿌리(葛根)와 칡밭(葛田)이 서로 만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약초와 약수의 고장 산청군 생초면에서 활동하다 그가 영면의 장소로 택한 곳 역시 생전에 그가 즐겨 처방했던 칡뿌리가 많은 칡밭이었다. 

 유이태의 후손들은 류의태가 유이태를 롤 모델로 만들어낸 허구라는 주장도 하고 있지만 산청군의 향토사학자 손성모 씨는 이에 대해 “유이태와 허준의 스승으로 등장하는 류의태 사이에는 시대적으로 100년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높으며, 유이태와 류의태는 이름이 비슷해 혼돈 할 수 있지만 산청과 거창 등지에는 ‘유이태가 백여우로부터 구슬을 얻어 신통한 의술을 얻었다’는 내용 등 수많은 전설과 일화가 섞여 떠돌고 있다”며 “조선 숙종 때 유이태 이외에 조선 선조 때 허준 선생의 스승인 류의태라는 사람도 실존했다”고 주장했다. 

 
 

 ◆초객·초삼 형제

 산청지역의 의학전통을 대표하는 또 다른 인물로 허초객(許楚客), 허초삼(許楚三) 형제명의(兄弟名醫)를 들 수 있다. 허초객은 지금의 산청군 단성면에서 영조 27년(1751) 허존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일찍이 과업을 포기하고 친동생 초삼과 함께 의학에 뜻을 두고 공부했다. 이들 형제는 산청일원을 중심으로 많은 병자를 치료해 그 명성이 당대에 풍미했고 그 후손들이 누대로 이 지역에 세거함으로써 의학인물로는 보기 드물게 의학사적이 비교적 잘 보전돼 왔다.

 또한 지리산 동남지역을 중심으로 산간지역에서 활동했고 선대에서 일찌감치 환로에 나가지 못하도록 유시했기에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적어 지역 의학적 특성을 보존한 채 의술을 펼쳐 왔다.

 형인 초객은 약 처방에 능했고, 아우 초삼은 신의 경지에 다다른 침술로 이름을 떨쳐 전설적인 명의 화타(華陀)와 편작(扁鵲)에 비유되기도 했으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동생이 먼저 침으로 응급치료를 하면 형이 약을 써서 병의 뿌리를 뽑아내는 역할을 했다. 현재 초객이 지었다는 ‘진양신방(晉陽神方)’이 전해지며, 초삼의 아들 제(濟)역시 의술이 뛰어 났다고 한다.

 후손인 허신(許信)의 문집인 ‘뇌산유고’의 종고조문포공묘갈명(從高祖文圃公墓碣銘)에 “초객은 영조 때 태어나 재주가 총민하고 성품이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로웠으며, 스스로 사람을 살리고 만물을 아끼는 것을 옳게 여겨 보답을 바라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살아있는 부처라고 불렀다”고 기록돼 있으며, 동생 초삼은 조선선비 하겸진의 문집 회봉선생유서(晦峯先生遺書) 중, 호은허공묘갈명(湖隱許空墓碣銘)에 “초삼은 풍채가 준수하고 재기가 남보다 뛰어나 의학에 특히 능통해 사람들이 동국(東國)의 화타나 편작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안상우 수석연구원은 “초객·초삼 형제명의는 남인계열의 후예로서 당쟁 등 정치적 이유로 인해 의약으로 전업하게 되는 계기가 돼 지방에서 학문적 소양과 문사지식을 바탕으로 의학 연구에 몰두해 지방의학을 성장시키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했다”며 “초객·초삼 형제의 문사적 지식과 사대부로서의 도덕적 의무감으로 무장돼 있기에 중인계층의 직업인 의원들에 비해 지역사회에서 인술을 펼치는 양식 있는 지식인으로 의료인상을 심어나가는데 일조했다”고 밝혔다.

 이렇듯 산청에는 역사적으로 재조명이 돼야할 당대 최고의 명의를 배출해 왔다. 그리고 산청군에는 동의보감촌내에 우리나라 최초의 한의학전문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는 자칫 역사 속으로 잊혀 질 수 있는 한의학 명의들의 활약상과 사료들을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꾸미고, 옛 한약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실제 모형과 디오라마(입체모형전시)등을 가미해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명의 유이태와 초객·초삼 명의형제, 이들의 업적은 동의보감 촌 곳곳에 오늘도 살아 숨 쉬고 있으며, 특히 산청한의학박물관에서 역사적 고증을 통해 그들의 긍휼애민(矜恤愛民)정신이 후세에 이어져 오늘도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제는 전국적인 힐링의 장소로 자리매김한 동의보감 촌. 산청군은 지난 2013년 세계전통의약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치른 경험을 발판삼아, 한의약의 국제적 위상제고와 산청군이 한의약을 포함한 의료관광의 선도 도시로서 위치를 선점할 수 있도록 다 각도로 연구 개발을 하고 있다.

 또 동의보감 촌을 통한 난 개발이 아니라 사회간접시설 및 지역경제 성장을 위한 지역인프라 확충, 관광객 증가, 군민 생활환경 개선 및 공동체 의식제고에 기여할 수 있도록 보존과 동시에 자연을 최대로 훼손하지 않는 ‘한방의 성지(聖地)’로 거듭나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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